용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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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대리

인제군 인제읍지도(위에서부터 하단으로 서화면, 북면, 인제읍, 남면, 기린면, 상남면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군(郡)의 북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어 북면(北面)이라 하였으며, 본래 원통(元通), 가역리(加歷里), 용대리(龍垈里), 남교역(嵐校驛), 온정(溫井), 송학동(松鶴洞), 한계동(寒溪洞), 풍전동(楓田洞)의 9개 리(里)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한계(寒溪), 원통(元通), 월학(月鶴), 용대(龍垈)의 4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1945년 38˚선 이북(以北)이 되어 공산치하(共産治下)에 있다가 1951년에 탈환하여 군작전(軍作戰) 지구로 되었다가 1954년 11월 17일 행정 이양에 따라 민정(民政)으로 돌아왔으나 지금도 용대리의 일부는 군용지(軍用地)로 쓰이고 있으며 행정리(行政里)는 17개 리다.
동남쪽으로 기린면(麒麟面), 서쪽은 동면(東面), 남쪽은 인제읍(麟蹄邑), 북쪽은 서화면(瑞和面)과 인접해 있으며, 상업(商業), 관광(觀光), 군사도시(軍事都市)로 급성장하고 있다.

용대리

본래 북면 지역으로서 용바우 아래가 되어 용의터 또는 용대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교리 창암, 가역리를 병합하여 용대리라 하였고 행정리 수는 3개리다.

가역리(加歷理)
가평
가역원(加歷院)
가평
가엽봉(加葉峰)
봉정암 북쪽 독성 나한봉 아래 있는 산으로 석가봉을 향햐여 읍하고 있는 형상이다. 가섭봉이라고도 부른다.
가야동(加耶洞)
영시암 동쪽에 있는 골짜기
가평(加坪)
암자동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가역원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고 관광지로 급성장하고 있다.
간령1(間嶺)
소간령1
간령2(間嶺)
소간령2
거북못
수렴동 안에 있는 거북이 모양의 못
고든백운
백운동 왼쪽에 있는 마을
광탄리
당정곡 동쪽에 있는 마을
광협동(廣峽洞)
암내동 서쪽 산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로 사방으로 갈 수 있는 교통이 좋은 곳이라고는 하나 폐동되었다.
교곡동(橋谷洞)
다릿골
구만동(九萬洞)
구만이
구만이(九萬理)
평촌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구만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구분백운
백운동의 오른편 굽은 골짜기
구연(龜淵)
거북못
구절터
백담사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백담사의 옛 절터
기린봉
봉정암 동족에 있는 산으로 기린처럼 생겼다.
남계(嵐溪)
남교
남교(嵐校)
당정곡 서남쪽 길가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보안도(保安道)에 딸린 남교역이 있었다.
남교리(嵐校里)
남교
남교역(嵐校驛)
조선시대에 남교리에 있던 역으로 복마가 3필, 노가 5명, 비가 3명 있었다.
내가평(內加坪)
가평의 안쪽 마을로 가평원(加歷院)이 있었던 곳이다.
노동(路洞)
백담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었으나 6.25때 폐동되었다.
다릿골
용대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다리가 있었으므로 교곡동(橋谷洞)이라고도 한다.
단일로(單一路)
용대 앞에서 한계리의 고원통 앞까지의 길로 1.6㎞ 구간이 좁아서 차 한 대가 겨우 운행가능하며 용대와 고원통에 초소를 두고 서로 전화로 연락한 뒤에 운행하고는 했으나 1987년 도로 확·포장공사를 마침으로 그 이름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당정곡(堂亭谷)
광탄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어느 한 선비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놀았다 한다.
도적소(盜賊沼)
창암 동쪽 즉 미실령의 큰 고개 아래에 있는 소로 도적들이 있다가 미실령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의 재물을 뻬앗은 뒤 이소에 빠뜨려 죽였다고 한다.
독성나한봉
(獨聖羅漢峰)
봉정암 북쪽에 있는 산
마등령
오세암에서 설악동으로 가는 길에 있는 큰 고개로 내설악과 외설악으로 가르는 분수령이 되며 해발 1327m로 설악산의 주봉인 청봉 다음으로 높고 매우 가파라서 산턱을 어루만지며 오른다는 뜻에서 마등령(馬登嶺)이라 한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동해바다가 바라보인다.
마장터(馬場垈)
옛날에 말장이 섰다하여 마장터라고 부르며 현재는 한세대가 살고 있다.
말마리
정자문리 서남방에 위치하고 있으나 지금은 이 지명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고 다만 지도상에만 표기되어 있다.
미시령
미시령
미실령(彌失嶺)
고성군 토성면 고암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고암리에 위치한다.
바람불이
바람이 심하게 불어 붙여진 이름으로 풍취동이라고도 한다.
백담리(百潭里)
백담사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었으나 폐동되었다.
백담사1(百潭寺)
백담사가 위치한 마을
백담사2(百潭寺)
가평 동남쪽 8㎞ 지점 곧 대승령 북쪽에 있는 절. 신라 진덕여왕 16년(647)에 한계리에다 자장율사가 세우고 한계사(寒溪寺)라 하였는데 소실 되 그 후에 불탄 나머지를 원성왕 6년(790)에 종연, 광학, 영조가 30리 아래에 옮겨 짓고 운흥사(雲興寺)라 하였다가 또 불탄 뒤에 고려 성종6년(987)에 형훈, 준희가 북쪽 60리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 하였으나 또 불에 탔으며 조선 세종16년(1434)에 취웅이 다시 30리 아래에다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하였으나 또 불에 타고, 세종29년(1447)에 서쪽 10리쯤 떨어진 곳에 옮겨 짓고 영취사(靈鷲寺)라 하였다가 또 불에 타자 세조2년(1457)에 재익(載益), 재화(載和), 신열(愼悅)이 옛 절터 위 20리 지점에 새 절을 짓고 백담사(百潭寺)라 하였다. 영조48년(1772)에 다시 불에 타고, 51년(1775)에 최붕(最朋), 대현(大賢)이 다시 세워 심원사(尋源寺)라 하다가 정조7년(1783)에 다시 백담사로 고쳤는데 1915년에 160여간의 절 집이 모두 불탔으며, 1919년에 인공(印空)이 지금의 자리에 75간을 다시 세웠으나 6.25동란 때 모두 불에 탄 것을 1957년에 다시 세웠다. 전설에는 본래 낭천(지금의 화천)에 있던 비금사(比琴寺)였는데 절 근처에서 사냥꾼들이 자주 와 사냥을 하여 불도에 어긋난 짓을 하므로 이곳 한계리에 옮겨지었다 하는데 옮길 때 춘천 근처에서 절구를 떨어뜨려서 그 곳을 절구골이라 하였다. 또 한계리 근처에서 청동화로를 떨어뜨려 그 곳을 청동벼래라 한다고 전해오며, 옮긴 후에 9차례의 화재를 보아 이곳 저곳에 옮겨 새로 지었으며 지금의 자리에 새 절을 짓고 이름을 붙이려 하는데 주지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청봉에서 이곳까지 못을 세어보아라" 선몽하여 그 말대로 못을 헤아리니 백개가 되어서 백담사(百潭寺)라 했다고 한다. 또 이 절에는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선사가 묵으며 많은 집필을 하셨으며 지금도 사찰 뒷편에는 한용운 선사가 팠다는 우물이 보존되어 있다.
백운동(白雲洞)
쌍폭동의 남쪽 골짜기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골마다 폭포가 쏟아져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버덩말
와가평 남쪽 들 옆에 있는 마을
범바우
할미봉 위에 있는 바위로 된 산이며 모양이 범처럼 생겼다 한다.
봉정암1(鳳頂岩)
백담사 동남쪽. 곧 대청봉 아래에 암자가 있는 곳
봉정암2(鳳頂岩)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짓고 오층돌탑을 세워 사리를 모셨는데, 문무왕 17년(677)에 원효가, 고려 고종13년(1226)에는 보조국사가, 조선중종 13년(1518)에는 환적이, 인조10년(1632)에는 설정이 각기 수리하였으며 6.25동란 때 불에 타서 근년에 다시 작은 암자를 지었다. 전국적으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암자로 더욱 유명하다.
상암(裳岩)
치마바우
석가봉(釋迦峯)
탑바우
서가시리탑
(釋迦舍利塔)
봉정암에 있는 돌로 된 5층탑으로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성황곡(城隍谷)
남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서낭당이 있으며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산삼을 캐거나 산채 채취 등을 목적으로 입산할 때는 서낭당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소간령1(小間嶺)
창바우 북쪽 소간령 아래에 있는 마을
소간령2(小間嶺)
대간령 서쪽에 있는 마을
수렴동(垂廉洞)
영시동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폭포가 있는데 그 모양이 발을 쳐 놓은 것 같다고 한다.
쌍룡폭(雙龍瀑)
용폭동 제일 위에 있는 두 가닥의 폭포로 한 가닥은 높이 150척이나 되고 또 한 가닥은 높이 70척이 되는 데 마치 쌍룡이 하늘로 치솟는 듯이 매우 웅장하다.
쌍폭동(雙瀑洞)
수렴동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쌍룡폭이 있다.
쌍폭(雙瀑)
쌍룡폭
암내동(岩內洞)
암자동
암자동(庵子洞)
내가평 안에 있는 마을로 백담사에 딸린 작은 암자가 있었으며 이곳에는 해체된 석탑이 있었으나 1987년에 지금의 백담사로 옮겨 복원하였다.
양지동(陽地洞)
평촌 북쪽 양지쪽에 있는 마을
연화동(연화동)
용대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한다.
영시동(永矢洞)
백담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6.25때 폐동되었다. 조선시대 인조26년(1648)에 삼연 김창흡(金昌翕)이 이곳에 영시암(永矢庵)을 짓고 살았는데 6년 되는 해에 찬모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호식동(虎食洞)이라고 하기도 한다.
영시암터(永矢庵一)
영시동에 있는 암자의 터. 김창흡의 부친이 숙종15년(1689)에 기사사화로 죽임을 당하자 세상의 뜻을 잃고 다시는 속세에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뜻에서 영시암(永矢庵)이라 했다고 한다. 1691년 설정(雪淨)이, 1926년에는 기호가 증수하였으나 6.25동란 때 불에 타 버렸다. 암자 서쪽에는 6.25이후에도 삼연선생 유적비가 남아 있었으나 언제 누구에 의해서인지 도난 당하여 지금은 자취만 남아 있다.
오세암1(五歲庵)
원명암 서남쪽 곧 마등령 아래에 있는 암자터
오세암2(五歲庵)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암자를 짓고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는데 인조21년(1643)에 설정(雪淨)이 헐어진 것을 다시 세워 오세암이라고 고치고 고종25년(1888)에 백하(白下)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6.25동란 때 불에 탔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조선시대 단종이 물러나자 그의 충절을 참지 못하여 미친 시인이 되어 강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오랫동안 머물렀으므로 그의 별호 오재신동(五才神童)을 따서 오세암이라 했다고도 전하고, 또 신라때 매월(每月) 대사가 두 살 된 조카를 데리고 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지내다가 늦은 겨울에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눈이 많이 내려 그 다음해인 봄이 되어 비로소 돌아와 보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조카가 살아 있으므로 이상히 생각하고 있는데 얼마 뒤에 흰옷 입은 젊은 부인이 나타나 아이를 보살피고 파랑새가 되어 날아가므로 다섯 살 된 아이가 불도(佛道)에 통한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암자 주변에는 상당히 많이 마모된 석물(石物)들이 즐비하게 널려져 있어 암자의 고풍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다.
오세폭포(五歲瀑布)
오세암터 아래에 있는 폭포
옥녀봉(玉女峯)
수렴동에 있는 산으로 산세가 순하고 아름다워 옥녀 같다 한다.
옥수골(玉水谷)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옥수골이라 한다.
와룡여흘
가야동에 있는 마을
외가평(外加坪)
가평 바깥쪽에 있는 마을
용대동(龍垈洞)
용대리
용두(龍頭)
용바우
용바우
용대 북쪽 길 양쪽에 우뚝 솟아있는 큰 바위로 쌍룡이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 한다.
용손폭(龍孫瀑)
쌍폭동에 있는 세 폭포 중 가장 작은 폭포
용아폭(龍兒瀑)
용손 폭보다 큰 폭포
용암(龍岩)
용바우
용이터
용대리
원명암(圓明庵)
오세암터와 영시암터 사이에 있는 백담사의 속암으로 숙종2년(1676)에 설정(雪淨)이 세우고 1897년 원호(源湖)가 크게 고쳤으나 6.25때 소실되었다.
원벌
가평 북쪽 400m에 있는 10만여평의 들로 조선때 가역원(加?院)이 있었다.
원평(院坪)
원벌
윗남교(上嵐橋)
남교 윗마을
이레가리
윗 남교에서 당정골 사이에 있는 논·밭을 말하며 그 넓이가 약 7,000여평에 달하여 소 한 마리로 7일을 간다는 뜻에서 부르는 지명
장경바우
장경바웃골에 있는 큰 바위로 대장경을 쌓아 놓은 것 같다.
장경 바웃골
봉정암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장경바위가 있다.
점심 청
수렴동에 있는 넓은 바위로 선녀가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정자문(亭子門)
남교 서남쪽 북천(北川)가에 있는 마을로 강가에 정자가 있었고, 길옆에는 열녀정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정자도 정려문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정자문리(亭子門里)
정자문
지장봉(地藏峯)
봉정암 북쪽에 있는 산으로 지장보살상과 같다고 한다.
창바우 :
용바우 북쪽에 있는 큰 바위로 창처럼 구멍이 뚫려 있는데 용의터의 용이 뚫고 나간 자국이라 한다.
창암점
창바우가 있는 마을로 주막(酒幕)이 있었으나 6.25때 폐동되었다.
처음터 :
내가평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6.25때 폐동되었다.
천왕문(天王門)
가야동 어귀에 있는 벼루로 된 바위로 문처럼 생겼다.
초대동(初垈洞)
처음터
축성암터(祝聖庵一)
영시동 남쪽 골짜기에 있는 암자터, 백담사의 속암으로 조선 고종21년(1884)에 한암(漢庵)이 세워 축성암이라 하였으나 6.25때 소실되었다.
치마바우
쌍룡폭 맞은편 벼랑으로 된 바위로 모양이 치마를 두른 것 같다.
칠경동(七耕洞)
이레가리
탑바우
봉정암 북쪽에 있는 웅장한 산으로 석가모니의 이름을 따서 석가봉 이라고도 한다.
평촌(坪村)
버덩말로 구만동 동쪽에 있는 마을
풍취동(風吹洞)
바람불이
하남교(下嵐橋)
남교 아랫마을
한문(寒門)
한문안
한문안
연화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 바위가 마치 문처럼 솟아 있다.
할미봉
봉정암 동쪽에 있는 산으로 할머니상이라 한다.
호식동(虎食洞)
영시동
황철골 :
몇 십년전까지 마을 입구에 황철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고 그로하여 황철골이라 불렀다.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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