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郡)의 최고 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 고구려의 개차정현(皆次丁縣) 또는 옥기현(玉岐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치도현(馳道縣)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 시대에는 서화현(瑞禾縣)으로 고쳐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속하였고, 다시 북쪽 일부는 회양(淮陽), 남쪽 일부는 춘주군(春州郡)에 이속 되었다가 조선(1424년) 세종 때 인제현에 이속되었다.
그 뒤 서화면(瑞和面)이 되어 심적,(深積), 장승리(場承里), 가리(加里), 사천(沙川), 논장(論章), 수제(水濟), 서화(瑞和), 서희(西希), 이포(伊布), 용산(龍山) 1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흥(瑞興), 천도(天桃), 서화(瑞和), 심적(深積), 가전(加田), 서희(西希), 장승(長承), 이포(伊布), 8개 리로 개편·관할하였으며 1945년 38˚선의 이북이 되어 공산 치하에 있다가 1951년 수복 되었다.
1955년 까지는 군 작전 지역으로 쓰이다가 그 해 5월부터 민간인이 천도리와 서흥리에 들어가 살게 되었고, 1958년 3월에는 서화리에도 살게 되었다. 1954년에 양구군 해안면(亥安面)이 인제군으로 편입되었는데, 1963년 해안면(亥安面)과 서화면(瑞和面)을 병합하여 서화면(瑞和面)이라 하였으나 1973년 7월에 해안면(亥安面) 관할이였던 현리(縣里), 오류동(五柳洞), 만대리(萬垈里), 후리(後里), 월산리(月山里), 이현리(泥峴里)를 양구군(楊口郡)에 환원하고, 지금은 서흥리(瑞興里), 천도리(天桃里), 서화리(瑞和里),가전리(加田里), 서희리(瑞希里), 심적리(深積里), 이포리(伊布里), 장승리(長承里) 8개리를 관할하고 있으나 가전리(加田里), 서희리(瑞希里), 심적리(深積里), 이포리(伊布里), 장승리(長承里)는 미수복 지구로 행정권이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관할하는 행정리는 8개리다.
동쪽은 고성군(高城郡)의 수동면(水東面)과 간성면(杆城面)에, 서쪽은 양구군(楊口郡) 해안면(亥安面)에, 남쪽은 북면(北面)과 인접해 있고 북쪽은 휴전선에 접해 있는데 그 길이가 12.7㎞에 달한다.
본래 서화면(瑞和面)의 지역으로 서화현(瑞和峴)의 소재지가 되기 때문에 서화(瑞和)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곡리(大谷里)를 병합하여 서화리(瑞和里)라 하였다.
1945년 38˚선 이북이 되어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1년에 국군이 탈환하여 군용지로 사용하다가 1958년 3월부터 민간인이 입주하게 되었으며 행정리로 2개리다.
구구골(九九谷)
구십구골
구십구골(九拾九谷)
수복이후 이곳에 99포병대가 주둔하게 되었는데 연유하여 '구구골', '구십구골'
라 부르게 되었다.
금수동(錦樹洞)
신촌 남쪽에 있는 마을
당봉(堂峰)
6.25사변 전까지만 하여도 이곳에 성황당이 있어서 마을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냈으나 소실되고 1956년 5월 육군 제5사단에서 '순직장병충혼비'를 건립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육군 제5사단 소속 장병으로 해발 1,500m의 고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59명이 1954년 1월에 내린 폭설로 인하여 참변을 당하자 당시 사단장이였던 준장 박정희 장군이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설화순직비'를 세우고 안치 시켰으며 비문(碑文)은 박정희 장군의 자필로 음각되어 있다.
대곡(大谷)
큰골
대골
큰골
동갯골
서화 서쪽 냇가에 있는 마을
동계동(東溪洞)
동갯골
봉황촌(鳳凰村)
현촌 남쪽에 있는 마을
산두곡(山頭谷)
산둣골
산두곡산(山頭谷山)
산둣골 산
산둣골(山頭谷)
큰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큰 산 뒤에 있다.
산둣골산
산둣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 1,019m 된다.
새마을촌
1980년 민북개발 사업으로 77동의 주택을 새로 건설하여 주민이 입주함으로써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지은 이름
신촌(新村)
새마을촌
연화리(蓮花里)
큰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연화부수형(蓮花浮垂形)이라 한다.
은동(은동)
탑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동쪽에 응봉산이 있다.
잿마을
금수동의 옛 지명으로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지금이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적계리(籍溪里)
큰골 동쪽에 있는 마을
점고개
천도리의 '점재'
제주도
점고개 넘어 강변 쪽으로 외지게 떨어져 있는 첫 동리로 수복 직후에 20여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5가구만 살고 있다. 현촌에서 뚝 떨어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