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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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리

인제군 상남면지도(위에서부터 하단으로 서화면, 북면, 인제읍, 남면, 기린면, 상남면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군(郡)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 고구려의 기지군(基知郡)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신라의 영토에 속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안변도호부(安邊道護府) 춘주군(春州郡)의 속현으로 기린현(麒麟峴)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춘주군(春州郡)의 속현으로 있다가 광무(光武) 10년(1906)에 인제군 기린면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남리(上南里)의 일부를 남면(南面) 김부리(金富里)에 넘겨주고 1945년 38˚선이 그어짐에 따라 상남(上南)과 하남(下南)은 그 해 9월 18일에 홍천군(洪川郡) 신남면(新南面)에 편입되었다가 1954년 수복지구 행정 이양에 따라 다시 인제군 기린면으로 환원되었다.
1973년 7월에 홍천군(洪川郡) 내면(內面)의 미산리(美山里)가 기린면(麒麟面)으로 편입(編入)되었으며 상남1리에는 기린면 사무소 상남출장소(上南出張所)를 두어 상남리(上南里)와 미산리(美山里)를 관활하였다. 1983년 1월 10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거 상남리(上南里),하남리(下南里), 미산리(美山里)와 남면의 김부리(金富里)를 편입(編入)시켜 기린면 상남출장소에서 상남면(上南面)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初代) 면장(面張)에는 박남원(朴南遠)이 취임하였다.
행정리는 10개리다. 동, 남, 서쪽으로는 홍천군(洪川郡) 내면(內面), 서석면(瑞石面), 내촌면(乃村面)에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기린면(麒麟面)과 남면(南面)에 인접해 있다.

미산리

본래 강릉군(江陵郡) 내면(內面) 내삼리(內三里) 지역으로 미산(美山), 미산동(美山洞)이라고 불렀으나 광무10년(1906)에 인제군(麟蹄郡)에 편입되었다가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연동(龍淵洞)을 병합하여 강릉군(江陵郡) 내면(內面)으로 환원되었으며 1939년에 다시 인제군(麟蹄郡)에 편입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38˚선을 경계로 양분되면서 홍천군(洪川郡) 내면(內面)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인제군(麟蹄郡) 기린면(麒麟面)으로 환원되어 기린면 상남출장소 관할하에 있었다. 1983년 1월 10일 상남출장소가 상남면으로 승격되어 상남면(上南面) 미산리(美山里)라 하였으며 행정리수는 2개리다.

개인리(開仁里)
칠앗 동북쪽 개인산 기슭에 있는 마을
개인산(開仁山)
칠앗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약수터가 있다.
개인약수(開仁藥水)
소 개인동을 지나 대 개인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개인산 중북에 있으며 1891년 지덕삼(池德三)이 수렵생활을 하다가 발견하였다.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며 위장병에 특효라고 한다.
계수동(桂水洞)
칠앗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뒤가 기암절벽으로 형성된 곳으로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다.
고목동(古木洞)
고목이 많다 하여 명명한 마을로 남밭골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밤나무 고목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곳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율곡 선생의 부친이 아들을 데리고 이곳을 지나다 주막에서 하루 머무르게 되었는데 꿈에 도인이 나타나 "너의 아들 수명이 길지 못하다."고 말하고는 무서운 호랑이로 변하면서 "이 마을 뒷산에 1,000그루의 밤나무를 심고 떠나라"하기에 며칠동안 밤나무를 심었는데 어느 날 꿈에 본 호랑이가 나타나서 밤나무를 세어 보자기에 세어 보니 한 그루가 모자라는 999그루였다. 한 그루는 어디에 있느냐고 호랑이가 다그치자 옆에 있던 상수리나무가 튀어나오며 "나도 밤나무"라고 외쳐 화를 면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남아있는 밤나무 고목은 율곡 선생이 심은 밤나무라고 전해오며 인제군에서는 전래마을 되찾기 운동으로 1988년에 이 마을에 밤나무 1,000그루를 지원 식재토록 하였다.
구미동(九尾洞)
운정동 동북쪽 후미에 있는 마을
구보(舊洑)
새로 만든 보 보다 먼저 만든 보
남밭골
남전동
남전동(藍田洞)
속사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양지바르고 토질이 비옥하다. 예전에는 쪽나무가 무성했다고 한다.
봉미소(鳳美沼)
옛날 소가 있었는데 주변 지형이 봉황새 형태로 아름답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빈자동
속사동 북쪽 반반한 곳에 있는 마을로 빈치전이라고도 한다.
빈지미치
빈지동
빈치전
빈지동
선래곡(仙來谷)
옛날에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고 전한다.
설내골
선래곡
설내동
선래곡
속사동(束沙洞)
여차울 동쪽에 있는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속새가 무성하였다고 한다.
속새
속사동
솔계동
양지촌 동쪽에 있는 마을로 소나무가 무성한데 연유하여 지은 이름
송계동(松契洞)
솔계동
수리바위
한니동 북쪽 방태산 중턱에 있는 바위로 수리같이 생겼다고 해서 지은 이름
승두촌(蠅頭村)
파리먹이의 다른 이름
식전동(食田洞)
양지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삼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신보(新洑)
새로 시설한 보
심바치
식전동의 다른 이름
양지동(陽地洞)
식전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
양지촌(陽地村)
양지마을
어두원길
개인리 동북쪽. 곧 구용덕봉 밑에 있는 골짜기로 뒤에 높은 산이 솟아 있고 골이 깊어서 늘 어두운데 연유하여 지은 이름
어유소(魚遊沼)
칠앗 남쪽에 있으며 고기가 노는 것을 항상 볼 수 있다하여 지은 이름
왕성곡(旺盛谷)
빈자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왕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용바위
조선말엽에 이곳에 살던 가난한 부부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나자 용마가 나타나서 밤낮 울어대므로 마을의 흉조라 하여 압사시켰다 하여 부르게 된 바위이름이라고 한다.
용연동(龍淵洞)
빈지동에서 20리 떨어진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약 3천평 되는 용늪이 있었으며 구룡덕봉에서 난 용마가 주인이 죽게 되자 이 늪에 와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운정동(雲井洞)
구미동 남쪽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로 양질의 샘이 있다는데 연유하여 지은 이름
재대곤(才垈坤)
이곳에서 산 사람들은 모두 부자행세를 하며 뽐냈다는데 연유하여 불러지는 지명
절골
절골에 있는 절터로 고려시대에 절이 있었다고 하나 자취를 찾기가 어렵다.
청소굽이(靑沼)
속사동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푸른 있고 물이 굽이쳐 흐르는데 연유하여 지은 지명
칙바치
칠앗고개 기슭에 있으며 옻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칙알고개
칠앗고개
칠앗재
칠앗고개
칠전(漆田)
칙바치
칠전현(漆田峴)
칠앗고개
파리먹이
남밭골 동쪽에 있는 바위로 파리머리와 유사한 바위가 있다는 데 연유하여 지은 지명
파리메기
파리먹이
파리먹이바우
파리먹이에 있는 바위로 파리머리와 유사하다고 한다.
한니동(寒泥洞)
빈지동 동쪽 방태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고산지대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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