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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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리

인제군 인제읍지도(위에서부터 하단으로 서화면, 북면, 인제읍, 남면, 기린면, 상남면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君(군)의 남쪽에 있어 南面(남면)이라 하였으며 두모동(頭毛洞), 건달리(建達里), 신촌리(新村里), 가노리(加奴里), 북평(北平), 청구(靑邱), 음양(陰陽), 구만(九萬), 유본정(楡本亭), 사치(沙峙), 어론(於論), 화탄(禾呑), 소치(所峙), 갑둔(甲屯), 금보옥촌(金寶玉村), 성황거리(城隍巨里), 백자동(柏子洞), 남전리(藍田里), 마노역(馬奴驛), 회둔촌(灰屯村), 반장리(半張里)의 12개 里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改編)에 따라 기린면(麒麟面) 상남리(上南里)의 일부를 편입하여 斗武(두무), 신월(新月), 관대(冠垈), 부평(富坪), 신풍(新豊), 어론(於論), 갑둔(甲屯), 김부(金富), 정자(亭子), 남전리(藍田里) 10개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45년 38˚선이 생김에 따라 남전(藍田), 두무(斗武), 관대리(冠垈里)는 공산치하(共産治下)에 들어가고 부평(富坪), 어론(於論), 정자(亭子), 갑둔(甲屯), 신풍(新豊), 신월(新月), 김부리(金富里) 7개 里와 인제읍(麟蹄邑)의 원대리(院垈里)와 기린면(麒麟面)의 북리(北里), 진동리(鎭洞里)와 함께 그 해 9월 19일에 홍천군(洪川郡)에 편입되어 신남면(新南面)이라 하고 신풍리의 북쪽 일부를 떼어 신남리를 새로 만들어 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51년에 수복되어 군정(軍政) 아래에 있다가 1954년 11월 17일 행정 이양에 따라 민정(民政)으로 돌아와 두무(斗武), 신월(新月), 부평(富坪), 신풍(新豊), 어론(於論), 정자(亭子), 김부(金富), 갑둔(甲屯), 남전(藍田), 관대(冠垈), 신남리(新南里)를 관할하다가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제군(麟蹄軍) 남면(南面) 두무리(斗武里)를 양구군(陽口郡) 남면(南面) 상산내리(上山內里), 하수내리(下水內里), 춘성군(春城郡) 북산면(北山面) 수산리(水山里)를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으로 승격되면서 남면 김부리(金富里)가 상남(上南)으로 편입되어 12개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행정리는 15개리다. 동쪽으로는 기린면(麒麟面), 서쪽은 양구군(陽口郡) 남면(南面), 남쪽은 춘천시(春川市), 북쪽은 인제읍(麟蹄邑)에 닿아 있다. 인제군(麟蹄郡)의 관문(官門)이기도 하다.

관대리

본래 남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마노역(馬奴驛)이 있었으므로 관(冠)터 또는 관대(冠垈)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개운리(開運里), 대흥리(大興里)를 병합하여 관대리(冠垈里)라 하였다.

개륜
개운이
개륜이
개운이
개운교
대흥리 앞에 놓였던 다리였으나 소양댐 침수지역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개운리
개운이
개운이
대흥리 옆에 있는 마을
관대(冠垈)
관대리
관터
관대리
군량동(軍糧洞)
임진왜란때 군량미를 저장한 곳으로 전해진다.
대흥교(大興橋)
개운교
대흥리(大興里)
관대리에서 외따로 떨어진 마을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인제군 남면 관대리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부자 김대흥(金大興)에 대한 전설이다. 부러운 것 하나 없이 살고 있던 김대흥 집에 하루는 남루한 옷을 걸친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했다. 때마침 외양간을 치우고 있던 그는 「무엇을 줄게 있어야지. 외양간에 있는 쇠똥이나 가지고 가시오」하며 쇠똥을 스님의 바랑에 담아 주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다가 이것을 본 며느리는 당황하여 만류하며 하는 말이 「개도 안 먹는 것을 사람에게 주시면 죄송스럽습니다. 등겨가 있으니 그것이나 한 바가지 주어서 보내지요」하고 며느리는 그것도 아까워 하는 시아버지를 설득하여 광에 들어가서 시아버지 몰래 쌀을 큰 바가지에 가득 담고 그 위에 등겨를 덮어서 스님의 바랑에 넣어 주었다. 그랬더니 스님은 감동하여「댁에 화가 급습할 것이니 자녀가 있거든 업고 나를 따르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시각을 지체 마시오」하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며느리는 아기를 업고 스님을 따라 집 뒤 능선으로 올라가는데 스님이 말하기를 도중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였다. 그러던 순간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무시무시한 뇌성 벼락이 일며 소나기가 퍼부어 큰 홍수가 나려 했다. 집안 일이 근심된 며느리가 스님의 다짐도 잊고 떠나온 집을 뒤돌아 보았다. 홍수는 이미 집을 뒤덮고 집의 흔적도 없었다. 이를 보고 망연 실신한 며느리는 마침 스님의 말을 어긴 탓인지 화석화(化石化)되고 말았다 한다. 전설은 전설이라 치더라도 이 마을에는 지금도 김대흥이 살았다는 집이 있던 터을 장자(長者)귀미라 부르고 있고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고개를 부소고개라 하는데 부자집으로 가는 고개라 하고 동리명도 대흥이라고 했다고 하나 지리원(地理院)에서 낸 「한국지명총람」에는 부소고개를 부소현(鳧巢峴)으로 표기하고 있어 전설 내용과의 뜻을 달리하고 있다.
뒤뜰
후평
뒤버덩
후평
마노진(馬奴津)
관터 앞에 나루터로 청구리로 건너다녔으며 지금도 학생들의 통학을 돕기 위하여 장학선이 운행하고 있다.
마노역(馬奴驛)
조선시대 관대리에 있던 역으로 기마가 2필, 복마가 4필, 관리가 5명, 노가 15명, 비가 8명이 있었다.
마리역(瑪璃驛)
마노역의 다른 한문표기명
배남동(背南洞)
마을이 남향을 등지고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부소고개
관터 서남쪽에 있는 마을
부소현(鳧巢峴)
관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통상 부소고개라 불렀다. 물오리 집이 많이 있다하여 지은 이름이다.
삼팔교(三八橋)
북위38˚선에 1955년에 놓여진 다리였으나 소양댐 수몰지역으로 자취를 감추고 38교라고 조각된 석각은 현재 닭바위 고개에 옮겨 놓았다.
후평(後坪)
대흥동 뒤 버덩을 말한다.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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