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효되어 국권이 피탈되며 신관제가 폐지되고 9월부터 집강을 면장으로 관찰사를 도지사로 부르게 되었다.
1914년 3월에는 부(府)군(郡)면(面)을 폐합(廢合)하여 전국 317군을 12부 218군으로 재조정 함에 따라 동면(東面)을 군내면(郡內面)에 통합시키고, 1916년에는 군내면을 인제면(隣蹄面)으로 개칭하여 인제, 남, 북, 기린, 서화면 5개면으로 재편성하고 기린면의 미산과 용연동(龍淵洞)이 강릉군 내면으로 속하게 되었다.
자주권이 상실된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자주권 회복을 위한 운동이 국지적(局地的)으로 전개하였다.
1912년 6월에는 윤치호(尹致昊) 이하 신민회원(新民會員) 120여명에 의하여 사내총독(寺內總督) 암살음모 사건이 있었으며, 이듬해는 유림계(儒林系)의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사건이 있었으며, 1918년 11월에는 만주(滿洲) 노령(露領)의 독립운동자 여준(呂準) 등 39명이 무오(戊午)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다음 해 기미년(己未年) 2월에는 동경유학생 6백여명이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같은해 3월 1일에는 장충단 공원에서 민족대 33인이 3.1독립운동집회를 가짐으로 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4월 중순경까지 최고조(最高潮)에 달하였다.
1930년 2차로 지방제도의 개정이 단행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전국의 행정구역은 13도 14부 41읍 2043면으로 되었다.
특히 1930年 12月 1日 제령(制令) 제12호로 공포된 읍(邑), 면제가 1931년 4월부터 시행됨에 따라 종래의 지정면이 읍으로 조정되어 읍이라고 하는 행정구역이 새로이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1939년에는 강릉군 내면이 다시 인제군으로 귀속되어 인제군은 6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45년 7월 26일에는 포츠담 선언, 카이로 선언에 이어 두 번째로 한민족의 해방을 약속하였으며, 연합군에 의하여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민족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한반도의 38도선 이남을 미군(美軍)이 이북지역을 소련군이 항복접수(降伏接收)한다는 명분으로 분담 점령한다고 일반명령 제1호를 포고(布告)하므로써 해방의 기쁨 보다 분단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국토가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자 인제군은 같은해 9월 16일 내면(內面) 전지역이 홍천군 내면으로 편입되고 인제면의 원대리(院垈里) 남면의 김부리, 신월리, 정자리, 부평리, 어론리, 신풍리 7개리와 기린면의 진동리, 북리의 일부, 하남리, 현리, 서리, 방동리, 상남리 5개리를 합하여 홍천군에 편입되면서 신남면(新南面)이 되었다.
38도선 이북의 인제, 북, 서화, 기린면 일부는 공산치하에서 5년간 신음하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