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은 금성태수(金城太守) 왕륭(王隆)의 아들로서 문무를 겸한 덕장이었고 일찍부터 궁예의 부하가 되어 후백제를 공격하는데 대공(大功)을 세우고 후고구려 건국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궁예의 실정으로 결국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여 다음해인 919년에는 수도를 철원(鐵圓)에서 개성(開城)으로 옮기고 내치외교(內治外交)에 힘을 기우려 국력을 신장하였다. 태조 18년(935)에는 신라의 영토를 병합하고, 다음해에는 후백제까지 정벌하여 분열되었던 후삼국을 다시 통일하는 대업을 완성하였다.
고려 태조는 융화정책으로 신라와 후백제의 유민들을 포섭하는 동시에 귀족들에게는 사심관(事審官)· 식읍(食邑)· 호장(戶長)등을 주어 회유하면서 사상(思想)·신앙(信仰) 등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정복지 주민들을 무마하였다.
고려 태조 23년 경자년(庚子年) 3월에는 각 주를 청주(淸州) 충주(忠州) 원주(原州) 광주(廣州) 공주(公州) 양주(梁州) 전주(全州) 광주(光州) 춘주(春州)로 개칭하고 모든 주부군(州府郡)의 이름도 아울러 개칭하였다.
또한 훈요10조(訓要십條), 계백료서(誡百僚書) 등을 반포하여 왕권을 확립하고, 고구려의 고도 평양을 중시하여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고 옛땅을 찾으려는 북진정책을 써서 서북면을 개척하고, 발해(渤海)의 유민(流民)들을 받아들이고 여진족(女眞族)의 거주지를 공략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였다.
특히 고려의 왕건을 확립하고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4대 광종이다. 광종은 즉위 후 온건한 방법으로 호족세력을 무마하면서 왕건의 안정을 꾀하여 기반을 세우고 서서히 호족세력의 억제수단을 마련하였다. 우선 956년에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여 지방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그반면 양인(良人)의 수를 확보하여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켰고,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신진관리(新進官吏)를 채용함으로서 개국공신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960년에는 백관(白官)의 공복제(公服制)를 실시하여 모든 관리의 복색(服色)을 계급에 따라서 자삼(紫衫), 단삼(丹衫), 비삼(緋衫), 녹삼(綠衫)의 네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들은 왕권을 확립하고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같이 광종(光宗)이 쌓아놓은 튼튼한 기반위에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개혁정치의 주역들이 제거되는 등 국기(國基)가 흔들리는 듯하였으나, 전제(田制)를 개혁하여 전시과제(田柴科制)를 실시하고 중앙관료들이 경제기반이 마련되는 등 점진적인 개혁을 실시하다가 경종이 6년만에 서거하고 성종(成宗)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928년에는 중앙관제(中央官制)를 제정하여 중앙집권제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983년에는 전국에 양주(楊洲)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진주(晋州) 상주(尙州) 전주(全州) 나주(羅州) 승주(昇州) 해주(海州) 황주(黃州)의 12목을 설치하고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특히 12목의 설치로 지방의 자치적인 향호(鄕豪)가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성종 14년 을미년(乙未年: 995) 9월에는 전국을 안동(安東) 안남(安南) 안북(安北) 안변(安邊) 4군호부(4郡護府)로 나누고, 관내(關內) 중원(中原) 하남(河南) 강남(江南) 해양(海洋) 영남(嶺南) 영동(嶺東) 산남(山南) 삭방(朔方) 패서(浿西) 등 10도로 분할하여 삭방도를 설치하면서 함경남북도(咸鏡南北道)와 영동일대(嶺東一代) 및 영서(嶺西) 춘천 이북등지가 편입되었는데 고려 명종(明宗) 8년(1178년)에 삭방도(朔方道)를 폐하고 함경남북도(咸鏡南北道)와 강릉 일대를 구분하여 연해 명주도(沿海 溟州道)라고 칭하고 춘천, 철원 등지를 구분하여 춘주도(春州道) 또는 동주도(東州道)라고 개칭하였다. 이때 인제는 춘주도에 속하였으며 공양왕 원년(1389) 현(縣)으로 승격되어 감무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