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동리

본문 바로가기 초점을 받기위한 요소

방동리

인제군 기린면지도(위에서부터 하단으로 서화면, 북면, 인제읍, 남면, 기린면, 상남면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군(君)의 동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며 본래 고구려의 기지군(基知郡)으로 신라 진흥왕(眞興王)(540∼574) 때에는 신라의 영토에 속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춘주군(春州郡) 속현으로 기린현(麒麟縣)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춘주군(春州郡) 속현으로 현내동(縣內洞), 광조전(光助田), 구을정(仇乙井), 오리동(五里洞), 답동(畓洞), 어리(於里), 하남(下南), 죽천(竹川), 신전(薪田), 김포(金浦), 상남(上南), 왕동(王洞), 문현동(文峴洞), 동리(東里), 방동(芳東), 북리(北里), 치전동(雉田洞) 17개 리를 관할하다가 광식(光式) 10년(1906)에 인제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남리(上南里)의 일부를 남면(南面) 김부리(金富里)에 넘겨 주고 군내면(郡內面)의 하추동(下楸洞) 일부를 편입하여 진동(鎭洞), 상남(上南), 하남(下南), 현(縣), 서(西), 북(北), 방동(芳東), 7개 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45년 38˚선이 그어짐에 따라 진동리(鎭東里)와 북리(北里)의 일부와 상남(上南), 하남(下南), 현(縣), 서(西), 방동(芳東) 5개리는 남면(南面)의 신풍(新豊), 어론(於論), 갑둔(甲屯), 신월(新月), 정자(亭子), 김부(金富), 부평(富平)의 7개 리와 인제읍(麟蹄邑) 관대리(冠垈里)와 함께 그 해 9월 18일 홍천군(洪川郡)에 편입되어 신남면(新南面)의 일부가 되었다. 1954년 수복지구 행정 이양에 따라 인제군(麟蹄郡)에 환원되어 진동(鎭東), 상남(上南), 하남(下南), 현(縣), 서(西), 북(北), 방동(芳東) 7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73년 7월에는 홍천군(洪川郡) 내면(內面)의 미산리(美山里)를 편입(編入)시켰으며 1983년 기린면 관할이었던 상남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면서 미산리(美山里), 하남(下南)과 상남(上南)이 상남면(上南面)으로 편입되어 현재는 5개 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행정리(行政里)는 15개 리다. 동쪽은 양양군(襄陽郡) 서면(西面), 서쪽은 남면(南面)과 홍천군(洪川郡) 내촌면(乃村面), 남쪽은 홍천군(洪川郡) 내면(內面)과 인접해 있다

방동리

본래 기린면의 지역으로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방동(芳洞), 동리(東里)를 병합하여 방동리라 하였으며 행정리로는 2개리다.

가나골 :
댓골
간촌(間村) :
 
곁가리 :
매봉령 밑에 있는 마을
곁가리 토성 :
1885년 무렵에 추씨가 70호 가량 거주하였는데 힘이 장사인 김용관(金龍寬)이라는 사람의 행패가 극심하여 토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자취만 남아 있다.
곁가리 피난굴 :
옛부터 삼가리 피난굴로 곁가리, 아침가리, 연가리를 지칭하였으나 현재까지 피난굴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높은집 폭포 :
마당바위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폭포로 밑에는 두 개의 구멍이 뚫어져 있어 홍천군 내면으로 통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이곳에 살고 있던 김순봉(金順鳳 : 1902)씨가 굴을 탐험하려고 했으나 좌절되었다고 한다.
대학동(大鶴洞) :
댓골
댓골 :
방골 서남쪽 방대산의 큰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도석골 :
석전촌
도채동(道採洞) :
도채울
도채울 :
방동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리에서는 동쪽이 되며 숫돌이 난다.
동리(東里) :
현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도채울로 많이 불린다.
두응대(斗應垈) :
두응터
두응터 :
방골 뒤에 있는 마을
둔덕동(屯德洞) :
방골 앞 둔덕에 있는 마을
뒤인대 :
두응터
마당바위 :
곁가리로 가는 길가 소계곡에 발달한 바위로 마치 마당처럼 넓은 면적을 차지한데 연유하여 마당바위라 부르며 유람지로 유명하다.
명지가리 :
큰 소(沼)가 있던 마을
명지거리 :
명지가리
방골 :
도채울 남쪽에 있는 마을로 광무10년(1906)까지 기린면사무소가 있었으나 뒤에현리로 옮겼다.
방동(芳洞) :
방골
방동약수(芳洞藥水) :
방골에 있는 약수로 옛날에 어느 마음씨 착한 심마니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산신령이다. 너는 가난하지만 정직하므로 내가 산삼을 주겠노라. 그리고 또 만병통치의 약물을 줄 터이니 세상에 널리 알려라."하여 그 이튿날 갈 곳을 찾고 있는데 한 아이가 나타나 손짓을 하므로 쫓아가 보니 아이는 없고 큰 산삼이 있어 캐고 나니 그 밑에서 약물이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경향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병 치료차 이곳을 찾고 있다.
배달은 돌 :
대 닿은 돌
배닿은 돌 :
옛날 대 홍수 때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2톤 가량의 커다란 돌에 구멍을 뚫어 배를 매달았다 하여 지은 돌 이름
봉두사(鳳頭寺) :
방태산 양지 기슭에 있었던 절이나 6.25당시 소실되고 지금은 자국만 남아 있다.
사동(寺洞) :
절골
샛말 :
둔덕동과 오류동 사이에 있는 마을
석전촌(石田村) :
예전에 구둘장 돌의 채취장으로 알려져 부르게 된 마을이름
선바우 :
오류동 북쪽에 있는 바위로 높이가 20여미터쯤 되는데 길옆에 우뚝 서 있다.
아들바위 :
잉태하지 못하는 아낙네들이 이 바위에 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부르게 된 이름
송응대(松應垈) :
두웅터라고 더 많이 불려지는데 이곳을 최초로 개간한 사람이 송씨라는데 연유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롱가지 :
방동교가 있는 곳
아침가리 :
방골 동남쪽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마을에 발이 적어서 아침나절에 다 갈수 있었다고 한다.
양원이 고개 :
현리에서 방동으로 통하는 구 도로변에 있던 고개로 이곳에는 춘천 박씨로 양동(陽洞)의 효행정려비가 있으며 조선말엽 통사랑(通仕郞)을 역임한 바 있다.
양은이 고개 :
양원이 고개
오류동(梧柳洞) :
산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옆에 다섯 그루의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오유동 :
오류동
용각석(龍角石) :
전구두평 앞산에 있는 큰 바위로 용의 뿔처럼 생겼다고 한다. 예전에 전구두평이 부촌(富村)이었는데 지나가던 중이 "이 바위를 장군석이라 고치고 한달동안 큰 잔치를 베풀면 더 큰 부촌이 되고 큰 인물이 나리라."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부자는 커녕 재해가 끊기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까닭 모를 병으로 죽어가므로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 숙의한 끝에 다시 용각석으로 고쳤더니 그 뒤에는 재난이 없었다고 한다.
자작나무골 :
곁가리로 들어가는 골짜기로 자작나무가 무성한데 연유하여 부르는 골짜기 이름
전구두평(奠九斗坪) :
샛말 앞에 있는 들로 오래전에는 큰 마을이 있었다.
절골 :
간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절말 :
절골
조경동(朝耕洞) :
아침같이
지석바위골 :
지석(支石)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골짜기
창바우 :
곁가리 길가에 있는 큰 바위로 창처럼 끝이 뾰족하다.
큰무랑골 :
곁가리로 들어가다가 있는 골짜기
큰물안골 :
큰무랑골로 발음한다.
만족도 조사

페이지 평가

이 페이지 정보가 도움이 되셨나요?

푸터 시작